1960년대 포뮬러1을 주름 잡았던 명 드라이버 잭 브래범은 은퇴 후 난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엔진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헬멧에 구멍을 뚫은 다음, 튜브를 연결한 후 한 쪽은 자신의 귀에 다른 한 쪽은 엔진 쪽에 붙여 놓았죠. 덕분에 그는 엔진의 상태를 조금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우승과 청력을 맞바꾸었습니다.
오늘날 막스 페르스타펜과 세르히오 페레즈는 잭 브래범처럼 청력 손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튜브를 대신할 텔레메트리가 있으며 현재 엔진 상태를 정확히 이야기해줄 사람들이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V8 자연흡기 시절의 엔진보다 소리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현재 포뮬러1카의 엔진 소리는 도로 위를 달리는 그 어떤 자동차보다 시끄럽습니다. 심지어 스무대가 넘는 자동차들이 동시에 같은 트랙을 달리면 엔진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죠. 그럼에도 어떻게 팀과 드라이버가 소통할 수 있을까요?
포뮬러1팀과 드라이버는 흔히 팀 라디오 또는 인터컴이라는 통신 장비를 이용합니다. 주변의 소리를 최대한 차단하고 보다 명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 드라이버는 레이스 전 귀 안쪽 터널 모양과 똑같이 제작된 인이어 헤드셋을 끼웁니다. 이따금 레이스 시작 전 드라이버들이 인이어에 침을 바르는 장면이 포착되는데, 조금이라도 더 부드럽게 밀착시키기 위해 침을 바르곤 하죠. 이렇게 외부 소음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면 팀과 더 뚜렷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팀과 드라이버가 레이스 중에도 소통하게 됐을까요? 팀 라디오가 처음 시작된 건 1980년대입니다. 윌리엄스에서 팀 라디오를 가장 먼저 도입했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무선 통신이 아니라 드라이버가 피트에 들어오면 헬멧에 통신선을 연결한 다음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제한되었고 대화 내용도 한정적이었지만 현재 차량 상태를 곧바로 전달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 전까지 팀과 드라이버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분필과 작은 칠판 아니면 피트 보드 정도가 고작이었니까요.
물론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고 해도 모든 드라이버가 이를 환영한 건 아니었습니다. 타고난 감각에 의존하며 임기 응변 등의 드라이버로써 역량을 발휘하는데 익숙한 일부 드라이버는 팀과 교신하는 것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성가신 절차라고 여겼다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과거와 달리 현재는 오히려 팀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더 불안함을 느끼죠. 그렇다면 현재는 어떤 방식으로 팀 라디오를 통해 소통하고 있을까요?
한 사람의 드라이버가 팀 라디오로 전달하는 이야기는 우선 담당 레이스 엔지니어와 담당 수석 미케닉이 먼저 듣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피트 월에 앉아 있는 레이스 엔지니어 및 테크니컬 디렉터, 프린시펄(감독)도 함께 이 내용을 청취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팀 사람들만 듣는 건 아닙니다. 레이스 컨트롤에서도 각 팀을 관리 감독하는 담당자가 팀 라디오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청취하죠. 게다가 거리 제한도 사라졌습니다.
만약 아부다비 그랑프리 레이스 현장에서 막스 페르스타펜과 그의 담당 엔지니어 지안피에로 람비아스가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면, 수천 km 떨어진 밀튼 케인즈의 레드불 레이싱 공장에서도 같은 시간이 같은 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TV 혹은 F1 공식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청취자들에게도 들려줍니다. 다만 우리가 듣는 내용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편집한 것들입니다. 그래야 욕설이 나와도 비프(Beep)처리를 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교신된 팀 라디오는 다른 팀 사람들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수의 사람들의 대화에 참가하지만 그 중 일부만 막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팀 라디오를 통해 어떤 대화를 주고 받는 걸까요? 대화 내용은 세션 별로 조금씩 다릅니다. 가장 많은 대화가 오가는 순간은 의외로 레이스가 아니라 연습 주행 때입니다. 트랙에 따라 레이스카의 셋업을 빨리 찾아야 하며 따라서 실제 레이스카를 타고 달리는 드라이버의 의견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엔지니어들은 다양한 세부 목표가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연습주행을 진행하며, 이 때 드라이버에게 세부 진행 항목을 지시하고 그에 따른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습니다.
여기에는 특정 코너, 특정 상황에서 레이스카의 셋업 변경 등과 같은 작전에 관한 내용도 포함됩니다. 이런 내용은 팀 외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얼마나 많은 대화들이 오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때는 피트 월은 물론이고 밀튼 케인즈에서도 레이스카의 상태나 셋업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팀 라디오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합니다. 드라이버와의 대화일 수도 있고, 엔지니어들 사이의 대화일 수도 있죠. 그리고 적어도 예선까지는 엔지니어들 사이의 대화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레이스가 시작되면 오히려 팀 라디오는 비교적 조용해지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드라이버에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엔진 셋업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그리고 차량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등 레이스카의 성능에 변화를 줄만한 조언은 일체 할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탓에 드라이버가 레이스에 집중할 수 없어 위험해진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팀은 항상 드라이버와 소통합니다. 때로는 드라이버의 의견이 절실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타이어의 상태가 어떤지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드라이버 뿐입니다. 그래서 팀과 드라이버는 레이스 중에도 제한된 내용이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타이어 교체 시점부터 미리 약속한 전략의 변경, 추월 시점 등 다양한 내용들이 오갑니다.
이렇게 팀 라디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트 보드는 유효한 소통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구간에서는 팀 라디오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숲이 많은 스파 프랑코샹은 잦은 혼선이나 잡음이 발생하는 서킷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현재 순위와 포지션처럼 즉각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없으나 그래도 꼭 필요한 정보는 피트 보드를 이용합니다.
이처럼 드라이버는 피트를 떠나도 팀과 계속 연결되어 있습니다. 팀의 작전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늘 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뿐만 아니라 팀이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눈과 귀의 역할도 수행합니다. 이따금 긴박한 상황에 너무 많은 조언에 오갈 때면 드라이버가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팀 라디오는 우승을 향한 가능성을 높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입니다.
만약 팀 라디오가 없이 레이스를 해야 한다면, 팀과 드라이버 모두 눈과 귀를 막고 레이스를 하는 것과 다름 없을 겁니다. 그만큼 의사 소통은 팀과 드라이버 모두에게 무척 중요합니다. 챔피언십 타이틀 결정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레드불 레이싱은 이번 주에도 수많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달릴 겁니다. 과연 이들이 어떤 내용을 소통하며 어떻게 우승 가능성을 높여가는지 다 함께 지켜봐 주세요!